카테고리 없음

연예인 중에서 "기부를 가장 많이 했다고 알려진 500억이나 기부를 한" 연예인

황해도 출신, 치과의사에서 배우로—파란만장한 출발

 

1928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신영균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처음에는 치과의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하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 무대에 뛰어들었다. 결국 1957년 영화 ‘과부’로 데뷔하며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연산군’, ‘5인의 해병’, ‘대원군’,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300편 가까운 작품에 출연하며 1960~70년대 충무로를 대표하는 남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연기 인생의 정점, 그리고 청룡영화상 3회 수상

 

신영균은 남우주연상 3회(청룡영화상) 수상 등 수많은 상을 거머쥐며, 한국 영화계의 전설로 남았다. 1년에 30편씩 영화를 찍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고, 김수용·정진우·신상옥 등 당대 최고의 감독들과 호흡을 맞췄다. 그의 연기는 단순한 스타를 넘어,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명연기로 평가받는다.

사업가로서의 성공—극장·제과·부동산까지

 

연기 활동과 병행해 신영균은 사업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1963년 서울 금호동에 금호극장을 인수해 새로 개관했고, 1985년에는 종로 관훈동에 명보소극장을 세웠다. 명보소극장 옆 명보제과를 인수해 부인과 함께 뉴욕제과,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더불어 당대 4대 제과업체로 키워냈다. 1973년에는 빌딩관리업체 한주흥산을 설립해 부동산 임대 사업에도 진출, 1992년에는 맥도널드와 합작해 맥신산업을 세우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다. 우리나라 최초의 볼링장도 신영균이 들여온 사업 중 하나였다.

정계 진출과 문화예술계 리더

 

배우와 사업가를 넘어 신영균은 정치인으로도 활약했다. 국회의원을 지내며 한국영화인협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 각종 단체 대표를 맡아 문화예술계 발전에 힘썼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문화예술계와 사회 환원에 집중했다.

‘구두쇠’ 오해와 검소한 삶, 그리고 기부의 시작

 

연예계에서는 신영균이 ‘짜다’, ‘구두쇠’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검소하고 낭비를 싫어하는 성격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그는 “돈은 죽기 전에 좋은 데 다 쓰고 가자”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다고 밝힌다. 2006년, 아내와의 금혼식을 호텔에서 성대하게 치르는 대신, 1억 원을 불우이웃 돕기에 기부하며 본격적인 나눔을 시작했다. 이전에도 어려운 동료 배우를 위해 몰래 지갑을 열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500억 원 명보극장·영화박물관 통 큰 기부—한국 영화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2010년, 신영균은 서울 중구 초동의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 원 상당의 재산을 영화계와 문화예술계에 환원했다. 이는 한국 영화배우가 영화계를 위해 기부한 액수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신영균은 “기증한 것은 100번 잘한 일”이라며, “영화를 넘어 문화계 전체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 기쁘다”고 밝혔다. 이 기부로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영화인 자녀 장학금, 단편영화제 지원,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 등 문화예술인 발굴과 양성에 힘쓰고 있다.

가족의 동의와 행복, 그리고 남은 재산의 사회 환원 의지

 

신영균의 기부는 가족 모두의 동의와 응원 속에 이뤄졌다. 그는 “가족이 찬성해주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손녀가 “할아버지 정말 멋쟁이”라고 말해준 것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한다. 신영균은 남은 재산 역시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다. 모교 서울대에는 100억 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고, 서강대 등에도 수십억 원을 내놓았다. 각종 구호 성금, 탈북 학생 장학금 등에도 꾸준히 기부를 이어왔다.

신영균의 신념—노블레스 오블리주와 후배 육성

 

신영균은 “영화계 지원과 후배 육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겠다”고 밝혀왔다. 그는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며, 평생 금주·금연·도박·여색을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아온 삶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명보극장 기부 이후에도 공연관광 문화융성, 충무로 문화예술 메카 육성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힘을 쏟고 있다.

한국 영화계의 전설, 그리고 영원한 멘토

 

신영균은 2010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대한민국 대중문화 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영화계 후배 봉준호 감독, 안성기 등도 “신영균 선생님의 격려와 지원이 큰 힘이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지금도 “내 관에는 성경책만 넣어달라”고 말할 만큼 신념과 소박함을 잃지 않는다.


FAQ

 

Q1. 신영균이 500억 원을 기부한 주요 목적은 무엇인가요?
A1. 한국 영화계와 문화예술계 발전, 후배 영화인 육성, 영화인 자녀 장학금 및 단편영화제 지원 등 문화예술 인재 양성을 위해서입니다.

Q2. 신영균의 기부로 설립된 재단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A2.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은 영화인 자녀 장학금, 단편영화제 지원,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 등 문화예술인 발굴과 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Q3. 신영균의 가족들은 그의 기부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A3. 가족 모두가 기부에 동의했고, 손녀는 “할아버지 정말 멋쟁이”라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Q4. 신영균이 남은 재산에 대해 밝힌 계획은 무엇인가요?
A4. 남은 재산 역시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으며, 모교 서울대 등에도 이미 수십억 원을 기부한 바 있습니다.